공명하는 권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고통은 여기에 두고 가세요. 그리고 세상에 나가 당신의 근사한 일들을 하세요.”

30여 년간 최소 156명의 어린 선수에게 치료를 빙자해 성범죄를 저질러온 래리 나사르(54)에게 최고 175년형을 선고한 판사 로즈마리 아퀼리나(59)가 법정에서 증언한 피해자에게 건넨 말이다. 기사에서 이 말을 읽는 순간, 두 눈이 그 문장에 멈춰 서고 마음이 저릿해졌다. 나사르는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과 미시간대학팀 닥터였다.

나흘 걸쳐 150명의 발언

어린 선수들은 자신이 당한 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십수 년간 혼란과 자책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물꼬가 터지자 서로가 서로를 발견해 비로소 “그것은 성범죄였다”고 함께 입 모을 힘을 얻었다. 아퀼리나 판사는 발언하기 원하는 모든 피해자에게 법정의 문을 열어줬고 원하는 만큼 길게 증언할 기회를 줬다. 거기에 더해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증인 하나하나의 발언에 귀 기울이며 위로와 감사, 칭찬과 격려를 했다.

언제나 냉정하고 공평무사하기를 요구받는 판사가 마치 피해자들의 치유자인 양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가해자에게 직접 분노를 드러낸 것은 얼핏 부적절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유죄 결정이 난 뒤 양형을 심리하는 자리로 배심원이 배석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사르는 불법 성인물 범죄로 징역 60년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순전히 법적 절차 관점에서 보면, 나흘에 걸쳐 150명 넘는 이들의 발언을 듣는 것은 무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퀼리나 판사는 일상적인 판사의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적 판단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법적 판결 이상으로 위로와 응징의 말을 건넴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 전기로 만들었다. 아퀼리나 판사가 귀 기울임으로써 사회가 함께 귀 기울였고 온 세계가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선수들이 끝없이 고통당하는 동안 용기 내 그의 범죄를 고발한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체조협회, 미시간대, 올림픽위원회 등은 선수들의 호소를 번번이 외면했다. 아퀼리나 판사가 법정에서 한 행위 하나하나가 미국 사회 전체가 이 조직들이 저질러온 잘못을 뒤늦게나마 인식했음을, 이제라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음을 상징했다. 아퀼리나 판사의 위로는 법정에 선 피해자 개인뿐 아니라, 비슷한 위치에 있었거나 그렇게 될까 공포를 느끼는 모든 약자에게 위로가 됐을 것이다. 아퀼리나 판사의 분노는 나사르 개인을 단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슷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와 그런 범죄에 무심했던 권력자를 향한 경고였다. 그 판결이 있은 뒤, 미시간대 총장과 미 체조협회 이사진 전체가 사퇴했다.


가해자에게 먼저 공감하는

권위는 이렇게 행사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가진 상징적 무게감을 이해하고, 안일하게 두른 테두리를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딱 한 걸음 넘어서주는 것. 아퀼리나 판사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고, 그가 한 말이 대양 건너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힘을 주었다. 가해자에게 먼저 공감하고, 그의 ‘홧김’을 이해하며, 가해자의 망쳐진 인생과 잃을 기회에만 주목하는 판결을 숱하게 보아온 한국의 피해자와 약자에게,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저런 역사적 순간이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가해자를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면 안 되거나, 모든 선처가 불합리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 순서다. 피해자에게 먼저 공감하고, 피해자의 뼈아픈 상처와 이미 잃어버린 기회에 먼저 주목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그 뒤의 선처만이 가해자에게 유달리 공감하는 판사 개인의 권위 남용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용서다.

래리 나사르의 죄는 30여 년간 거듭된 뒤 처벌됐다. 이 땅에서는 서지현 검사가 8년의 고통을 딛고 용기 있는 증언을 내놓았다. 우리에게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명해주는 권위가 필요한 순간이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필요했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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