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원·서기석 스윙보터가 운명 갈랐다


2018년 6월28일 이진성 헌법재판소장(가운데)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헌법소원·위헌법률심판제청 사건 선고 공판을 진행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처벌이 68년 만에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은 헌법재판소의 ‘스윙보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윙보터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진보·보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그때그때 이슈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중도 성향의 대법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 연방대법원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국의 스윙보터는 그동안 보수가 장악한 최고 법원에서 의미 있는 소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몫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 헌재 결정에서는 그동안 소수 의견에 그쳤던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반대’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오른쪽은 서기석 헌법재판관. 연합뉴스

스윙보터 역할을 한 강일원·서기석 헌법재판관은 지난 6월28일 보수 성향 재판관들과 함께 병역거부 처벌 조항(병역법 제88조)에 합헌 의견을 냈다. 하지만 두 재판관은 대체복무제도가 없는 병역 종류 조항(병역법 제5조)에 대해서는 진보 성향 재판관들의 헌법 불합치 결정에 가담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막는 데 일조했다.

두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로 인정해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병역거부 처벌 조항에 합헌 의견을 냈다. 이는 “대체복무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진보 성향 재판관들의 일부위헌 의견과 내용상 같은 맥락이다. 대체복무제도 도입 전까지 처벌을 중단하면 양심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 재판관과 강 재판관은 일부위헌 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과 함께 의결정족수(9명 중 6명 이상 찬성)를 채워 대체복무제 도입을 다수 의견으로 만들었다.


이진성 헌재소장 체제의 6기 재판부에서 강 재판관과 서 재판관은 각각 중도와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강 재판관은 6기 재판부에서 가장 진보적 의견을 많이 낸 김이수 재판관과 여러 사건에서 같은 의견을 냈지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교원노조법(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사건) 합헌 결정 등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맞선 사건에서는 보수적 의견에 가담했다.

헌재 사정을 잘 아는 법조인들에 따르면 강 재판관은 이번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이 논의되기 시작한 5기 재판부(박한철 헌재소장 체제) 때 이미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에 반대 의견을 갖고 있었다 한다. 2012년 국회 여야 합의로 재판관이 된 그는 앞서 4기 재판부(이강국 헌재소장 체제)가 2011년 8월 7 대 2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을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2016년 세계헌법재판기관협의체인 베니스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출된 그는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만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지인들에게 “베니스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한국도 이젠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할 때가 된 게 아니냐’는 말을 듣게 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강 재판관과 달리 서 재판관은 5기 재판부 때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보수 성향 재판관들의 ‘국가안보 약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병역의무의 형평성이 깨질 가능성은 우려했다. 그는 사석에서 “아침저녁으로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교도소에 가는 청년들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대체복무를 허용해야 하지만, 이 제도가 ‘금수저’에 악용될까 걱정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처럼 보수적 견해와 결이 달랐던 서 재판관은 재판 과정에서 다른 재판관들의 주요 타깃이 됐다. 서 재판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양쪽의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박근혜 정부 때 기회 있었지만…

5기 재판부를 이끌던 박한철 전 헌재소장은 재임 기간에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가 공을 들였던 아시아인권재판소 설립에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이 걸림돌이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인권재판소는 ‘공안검사 출신으로 인권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희석시킬 수 있는 좋은 카드였다. 이 재판소를 한국에 설립한다면 역대 헌재소장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소장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5기 재판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결정할 것이란 전망을 낳았다. 주심인 김이수 재판관과 강 재판관의 노력으로 서 재판관이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할 것이라는 말이 헌재 안팎에서 돌았다. 일각에서는 위헌 의결정족수인 6명을 확보했다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왔다.

그러나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한 달 뒤 박근혜 정권의 개성공단 폐쇄 결정은 헌재의 이런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남북한 정권의 강대강 대치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자 헌재 안에서 ‘대체복무제 시기상조론’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결국 기존 판례를 변경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5기 재판부는 이 사건을 무기한 연기했다.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 같던 분위기는 2017년 11월 이진성 헌재소장 취임을 계기로 확 바뀌었다.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헌재소장 후보자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전향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만장일치(8대) 결정으로 헌재 지지 여론이 높아지자 헌재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이 헌재소장과 주심인 김 재판관, 강 재판관을 포함한 5명의 재판관이 2018년 9월 임기 만료로 대거 퇴임하기 전에 결론을 내리자는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2011년 합헌 결정 때 다수 의견에 가담했던 박한철·이정미 재판관이 퇴임하고, 후임으로 임명된 유남석·이선애 재판관이 인사청문회 등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긍정적 견해를 밝힌 바 있어 2011년 판례를 변경할 가능성도 커졌다. 이 헌재소장은 해가 바뀌자마자 심리를 다시 시작했다.

서기석 재판관이 움직였다

캐스팅보트를 쥔 이는 서 재판관이었다. 그가 대체복무제 도입에 동의한다면 6명으로 다수 의견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그의 태도에 변화가 감지됐다. 그는 지인들에게 “더 이상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교도소에 보내서는 안 되지 않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미 일선 법원에서는 대법원과 헌재 판례를 따르지 않고 무죄를 선고하는 일이 잇따랐다.

서 재판관은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 제88조를 위헌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가졌다고 한다. 악의적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하면 헌법에 규정된 국방의 의무와 충돌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병역의 종류를 규정한 병역법 제5조 1항에 주목했다. 대체복무제를 병역의 한 종류로 규정하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처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5조 1항만 고치면 병역 거부 처벌 조항을 손대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강 재판관이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고, 제88조에 일부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도 제5조 1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견해에 동의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을 막는 효과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판례 변경 자체를 반대한 보수 성향의 재판관들도 큰 반발이 없었다 한다.

병역 종류 조항은 이전 판례에서는 위헌 심판 대상이 아니었다. 2011년 헌재 결정 때 한정위헌(소수 의견)을 낸 이강국 전 헌재소장은 “기존 재판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제88조(처벌 조항)에서 규정한 ‘정당한 사유’에 포함할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 이번 결정은 핵심 쟁점을 피해간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2011년에는 치열한 ‘진검승부’가 벌어졌다. 무려 7명의 재판관이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을 합헌으로 판단하면서 헌법적 쟁점뿐 아니라 한반도 특유의 안보 상황과 병력 자원 손실 등 정치적 요인까지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맞서 소수 의견을 낸 이강국 헌재소장과 송두환 재판관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는 대만도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고, 미국도 남북전쟁 중에 종교 교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사례 등을 언급하며 반론을 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헌재소장은 “양심적 병역거부는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는 인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소회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보수 반발 잠재운 캐스팅보터의 묘수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6월19일 재판 선고 날짜를 공개했을 때 이미 대체복무제 도입 가능성을 점치는 시각이 우세했다. 대법원이 최근 일선 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이 잇따르는 것과 관련해, 8월 공개변론을 열고 전원합의체에서 다루기로 하는 등 전향적 움직임을 보인 것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등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헌재 관계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을 방치하는 것은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사법부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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